네?
무슨 과를 나오셨다고요?
요즘 디자이너들의 이력서를 읽다 보면 신기할 때가 많다. 시계 주얼리 디자인과, 파티
디자인과, 의료환경 디자인과, 관광뷰티 디자인과, 특수분장 디자인과, 보석감정 디자인과, 복원영상 디자인과… 이것은 요즘 우리나라 대학교에
존재하는 디자인학과 명칭들이다. 이런 학과에선 뭘 가르칠까 궁금하기도 하면서 과거에 비해 디자인 영역이 굉장히 넓어졌음을 실감한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디자인 학과라고 하면 ‘시각디자인과 공업디자인’으로 나뉘어 있을 뿐이었다. 그때, 시각디자인과는 졸업하면
방안 대지에 로트링 펜으로 선을 긋고, 사진식자를 오려 붙이는 일을 하는 것이었고, 공업디자인과를 졸업하면 손에 조각칼과 망치를 들고 금형과
사출을 통해 무언가를 쿵쾅쿵쾅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미래였다. 지난달에 소개했던 폴 랜드 같은 디자이너가 그 당시 시각디자인
전공생들이 흠모하던 롤모델이었다면, 공업디자인 전공자들에게는 오늘 소개하는 ‘하르트무트 에슬링거’ 같은 디자이너가 롤모델이었다. 에슬링거가
얼마나 위대한 디자이너였는지는 딱 한마디로 설명된다. 그는 매킨토시를 디자인한 사람이다.
백설공주(Snow
White). 모던 디자인의 주류가 되다.
독일에서 태어난 에슬링거의 첫 번째 성공은 TV에서였다. 그는 자신이
창업한 프로그 디자인(Frog Design)을 이끌며 독일의 베가(Wega) 3020을 시작으로 TV와 오디오 시리즈를 통해 Snow
White를 디자인 패러다임으로 제시한다. 그의 제안은 지금은 흔하게 사용하는 ‘백색가전’이라는 단어의 원조가 된다. 그 후, 소니(Sony)에
스카우트되어 역대급 걸작 컬러 TV인 트리니트론 시리즈의 디자인을 책임지던 에슬링거는, 1982년, 스티브 잡스의 연락을 받는다. 이미
제록스로부터 마우스를 훔친 전력이 있는 위대한 절도범 잡스가 원한 것은 에슬링거를 통해 소니의 디자인을 훔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에슬링거에게 “만약 소니가 컴퓨터를 만든다면 어떻게 디자인할까?”를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에슬링거는 소니가 아닌 레이먼드 로이(코카콜라
병과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디자인했다)로부터 영향을 받은 가장 미국적이면서도 유연한 디자인을 제안한다. 물론 자신의 고유한 아이덴티티인 Snow
White의 원칙은 고수하면서. 그리고 얼마 후, 모두가 알다시피 바로 그 ‘매킨토시’가 태어난다. |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 vs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애플은 “디자인이 좋다.” 라는 명제를 재정립시킨 기업이다. 좋은
디자인이란 것이 단순하게 시각적이나, 기능적 만족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이제 우리는 생각한다. 이
생각의 시초를 제공한 장본인 또한 에슬링거다. 그는 애플에서의 작업을 통해 디터람스가 주장하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현대 디자인의
핵심철학에 도전하면서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성과 기능을 중시하던 시대를 지나, 감성과 사용자 경험이
더욱 중요시되는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는 30여 년 전 에슬링거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안다. 이 글의 서두에서 과거에는 시각과 공업디자인만으로
구분되던 대학교의 학과들이 이제는 다양해졌다고 썼다. 그 또한 어쩌면 에슬링거 덕분이다. 형태가 기능을 따르던 시대가 저물다 보니
‘공업디자인’이라는 단어 역시 수명을 다한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의 감성과 경험을 표현해야 하다 보니 여러 형태의 디자인 공부가 필요로 해진
것이다.
어서 오소서. 세상을 변화시킬 디자이너여!
올해 펜타브리드가 붙잡는 화두는
‘Connect & Movement’다. 나는 이 숙제의 힌트를 에슬링거에서 찾아본다. 독일인이었던 그는 이성과 기능을 중요시하던
디자인을 누구보다 제대로 배웠던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Snow White라는 자신만의 독창성에 미국적 디자인을 교접(Connect)했고
그 결과물로 매킨토시와 애플의 컨셉 디자인을 제시했다. (아래 에슬링거가 그린 애플의 컨셉 이미지(프로토타입)들을 보라. 30여 년 전에 그린
것들이다. 지금 봐도 ‘후덜덜’하지 않은가?) 또한 그로 인하여 공업디자인이라는 개념은 - 감성적 디자인, 서비스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페이지로
이동(Movement)했다. |
에슬링거는
말했다. “디자인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맞다. 이것이 디자이너의 진짜 힘이다. 사람의 눈을 홀리는 그래픽을 보여준다거나,
무수한 기능을 잘 정리해서 하나의 박스에 집어넣을 줄 아는 에디터가 아니라, 새롭고 낯선 것과 이종적 결합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일은 오늘과
다른 문제를 가지고, 오늘과 다른 것을 만들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디자이너. 기어코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디자이너. 이런
디자이너라면 처음 들어보는 디자인 학과를 나왔어도, 아니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를 할 줄 몰라도 상관없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일하고 싶으니 펜타브리드로 이력서를 보내주소서. 부디.
*사진출처:
Design Forward, www.designboom.com, 기즈모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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