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션과 공간. 무엇을 지배해야 하는가?
길이 105미터 이상, 너비 68미터 이상. 이것이 공식경기가 가능한 축구장의 사이즈다. 경기가 시작되면 팀 당
11명의 선수와 한 명의 심판, 이렇게 23명 만이 이 축구장 위에서 공과 함께 뛴다. 90분을 쉼 없이 달린다 하더라도 한 선수가 ‘순간에’
밟을 수 있는 땅은 평방 50센티미터를 넘지 못한다. 즉, 축구장에는 언제나 90% 이상의 ‘공간’이 남는 셈이다. 그래서 축구 중계방송을 보면
해설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바로 이 공간의 중요성을 목청 높여 외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BC 7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축구라는 스포츠가
‘공’이 아닌 ‘공간’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40년쯤 전부터다.
공간을 지배하는 축구는 사실
이론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론을 만든 사람은 20세기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받는 리누스 미헬스(Rinus Michels)였다. 그는 이미
1950년대에 축구가 포지션이 아닌 공간의 게임임을 간파했다. 공격수와 수비수가 나뉜 채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수가 자기 포지션을 벗어나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상대를 압박할 때, 승리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미헬스는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발견은
오랫동안 이상에 불과했다. 포지션을 버리고 공간을 지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선수들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 ‘요한
크루이프’라는 천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요한 크루이프는 위대한 운동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하지만 그를 최고로 만든 것은 축구가 단순하게 골을 넣는 게임이 아니라 ‘아름다운 90분을 보여주는’ 이전과는 다른 드라마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루이프는 한 박자 빠른 패스와 유기적인 포지션 변경이 그라운드 위에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비밀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크루이프는 아약스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그리고 FC바르셀로나의 캡틴으로 ‘토탈 사커’라는 축구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쓰기 시작한다. 공간을 압박하며 찬스를 만드는 축구가 자리 잡으면서, 게임은 점점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대에 들어와 크루이프와 유소년 때부터 함께 토털 사커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사비, 메시, 이니에스타, 피케, 파브레가스 등의 활약으로 아름다운 축구는 FC바르셀로나를 통해 완성된다.
찬스는 논리적인 것이어야 한다. 게임은 아름다운 승리여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직능’으로 구분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기획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AE… 이 습성이 공격수와
수비수로 나뉜 채 자기 포지션에만 머무는 ‘오래전 축구’와 같은 것이 아닌지 나는 의심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 -
클라이언트에게 해줘야 하는 대답이 정말 기획, 디자인일까. 단언하건대 틀렸다. 나는 우리 업(業)의 본질을 3단계로 나누고 싶다. 첫 번째는
정보의 획득이다. 고객으로부터, 그리고 경험과 시장으로부터 남보다 많은
정보를 발견해 내는 것이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두 번째는 정보의
해석이다. 획득한 정보를 조립하고 해체해 나가면서 우리만의 해석과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단계를 지나야 마지막 단계인 정보의 표현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특별한 제안서 혹은 특별한 시각적 산출물 말이다.
따라서 냉정히 생각해보면 기획자와 디자이너의 구분은 일의 마지막
단계에서만 필요한 것이다. 정보를 얻고, 해석하는 그 이전까지의 작업에 직능의 구별이란 있을 수 없다. 요한 크루이프가 주창한 대로 우리도
각자의 직능, 각자의 포지션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프로젝트를 달리며 새로운 공간과 찬스를 발견해야 한다. 해체하고 조직하고, 말하고 듣고,
설명하고 설득하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논리적인 찬스를 발견하며 고객에게 ‘아름다운 펜타브리드의 축구’를 보여줘야 하는 조직이다. 그러려면? 이미 요한
크루이프가 답을 주었다. 토탈 사커를 위해 준비된 재능과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 당신의 포지션을 뛰어넘는 그 이상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
‘당신’이 다섯 명, 열 명, 오십 명, 백 명으로 늘어날 때 ‘승리의 역사’가 우리와 함께 오래 머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