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질문에 대한 사실적인 이해와 대답.

펜타브리드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고객으로부터 ‘제안요청서’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제안요청서에는 고객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답에 대한 ‘질문’이 들어있다. 제안을 시작한다는 것은, 고객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왜 했는지’ 에 대한 분석과 파악부터 출발한다. 고객의 현재 컨디션, 시장의 환경, 요구의 목적 등 ‘질문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고객이 요청한 제안, 즉 크리에이티브를 적용한 해답은 그다음부터 찾는 것이다. 제안에 실패하는 대부분의 경우, 진짜 원인은 바로 이 ‘질문의 바른 이해’ 단계를 무시하거나 건너뛰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고객이 원하는 해답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제안이 되는 것이다.
고객의 진짜 고민은 ‘자동차를 100대 더 파는 것’이지 디자인이 눈부신 홈페이지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문가로서 꺼내야 하는 해답은 ‘눈부신 디자인 덕분에 자동차를 100대 더 파는 방법론’이 되는 거다. 하지만 대체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자랑, 레퍼런스 자랑, 고객에게는 적용하기도 곤란한 트렌드만 한참을 늘어놓거나, 그게 아니면 "서비스 잘해 드릴께요!" 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게제안에 실패하면 ‘우리의 크리에이티브와 디자인도 이해 못 한다.’며 애꿎은 고객 탓을 한다. 운이 좋아 제안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고객은 우리를 보며 "이 친구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하는 근심이 남는다. 즉, 프로젝트가 시작할 때부터 갑과 을의 평등한 관계 맺기는 이미 실패한 셈이다. 그렇게 되면 수행과정 내내 힘들어진다. ‘질문에 대한 사실적인 이해’를 무시한 당연한 댓가다.

繪事後素(회사후소) ? 바탕을 먼저 그리고, 재주를 피워라.
크리에이티브는 ‘사실이라는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 올리는 상상력의 탑’ 이다. 사실이라는 바탕이 없다면 그건 그냥 ‘공상’이다. 나는 그런 공상을 크리에이티브라고 착각하는 - 오래 관계하기에는 좀 곤란한 - 사람들과 참 많이 만났다가 헤어져 왔다. 문제는 ‘기초’다. 크리에이티브로 밥을 먹고 살기에는 기본기가 많이 부족한 거다. 그런 의미에서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77)’라는 크리에이터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사실주의 미술의 대가’라고 가르치지만, 실제로 [자화상] 말고 그의 그림을 보여주는 선생님은 거의 없다. 그가 진짜 ‘보이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대부분 청소년들이 보기에는 민망한 ‘19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쿠르베를 설명한 이후 그의 그림을 보여주는 대신 아그리빠나 비너스, 혹은 테이블에 사과 두어 개 올려놓으며 데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일쑤다. 쿠르베는 [잠] [잠 깨움] [하얀 스타킹의 여인] 같은 수많은 ‘벗은 여자그림’을 통해 여체를 ‘보이는 그대로’ 묘사했고, 급기야 지난해 인터넷 외설논쟁으로 한바탕 시끄러웠던 여성의 음부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세상의 근원]까지도 그렸다. (세상의 근원이 오르세 미술관 벽에 걸린 것은 지난 1995년부터다. 쿠르베가 죽은 지 100년이 넘어서야 그의 사실적인 묘사가 드디어 ‘예술’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살아있을 때는 어쩌면 ‘변태’ 취급을 받아야 했을 ‘사실 그대로’에 대한 쿠르베의 집중은 후대에 결국 그를 ‘최초의 모더니스트이자, 최고의 리얼리스트’로 인정받게 한 것이다.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어서 그리지 못한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그려보겠다. 망막에 비치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 이것이 쿠르베의 신조였다.

Creative는 사실이라는 기초 위에 쌓아 올리는 탑 

그림 말고, 쿠르베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집중하고 상상해보자. 그는 매우 ‘잘생기고 섹시한 남자’였을 것이다. 그가 자화상으로 그린 [The Desperate Man(그림1)] 을 보면 그가 매우 스타일리시한 마초임이 드러난다. 물론 스스로를 미화했을지도 모르나, ‘사실주의’에 입각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그가 유독 자기 얼굴에만 뽀샵처리를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그림2)] 라는 작품을 보면 그에 대해 조금 더 상상할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오른쪽에 건방지게 콧대를 세우고 있는 쿠르베와 그 앞에서 하인과 함께 고개를 조아리는 ‘고객(작품구매자)’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그림 앞에서 내 상상력은 이렇게 확장된다. 예나 지금이나 수컷들은 여성에게 집착하는 동물이다. 쿠르베는 당시 가장 사실적으로 ‘벗은 여자’를 그려내는 화가였다. 돈 많은 호색한들이 마누라 몰래 그의 그림 한 장씩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플레이보이를 탐독하던 사춘기 소년들처럼 살롱에 모여 서로 돌려보기도 했을 것이다. 즉, 쿠르베는 고흐나 고갱처럼 평생 가난에 찌들었던 예술가가 아니라 ‘확실한 구매자’가 있는 상업적 아티스트였을 것이다. 그는 고객이 원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우월한 위치에서 자기 그림을 당당하게 팔았다. 훗날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예술훈장 따위는 가볍게 거부해 버릴 정도로 오만한, 먹고 살만한 아티스트였던 것이다.

 


 

질문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찾아라. 

우리도 그렇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출품하려고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크리에이터의 삶이라는 것은 ‘갑’에게 돈을 받고 ‘을’로써 자신의 재능을 파는 것이다. 쿠르베는 수천 년간 깨지지 않고 이어지는 이 ‘갑을의 질서’조차 ‘압도적인 재능과 마케팅을 읽는 눈’으로 교란시킨 크리에이터였으며 ?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전문가로서의 슈퍼 을’을 논하고 상상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쿠르베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자유의 규칙 외에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다고 말하라.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혁명이 의미하는 모든 것의 지지자이고 무엇보다도 우선 나는 리얼리스트이다."
쿠르베는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상투적인 낭만이 ‘그려야 하는 진짜’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본질을 미화하는 것이 아닌, 본질 그 자체, 질문 그 자체를 그려내고 팔았다. 당시에도, 100년이 지나도 윤리와 도덕의 잣대가 그의 작품과 투쟁했지만, 그가 그려낸 것은 ‘기초가 탄탄한 사실주의 작품’이었기에 결국은 세상은 쿠르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The Creator라는 시리즈의 연재를 시작하며, 첫 꼭지로 구스타브 쿠르베를 말하는 것은 그가 이해하고 집중한 바와 그 ‘기초’ 때문이다. 쿠르베는 자신의 재능이 무엇이며, 시장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분명히 알았던 사람이다. 골방에 갇혀서 평생 외롭게 ‘자기만의 예술’을 한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이해하고 대답을 그려낸 후, 폼나게 팔았던 크리에이터이다. 덕분에 잘 먹고 살았을 것이고, 훗날 그는 사실주의의 대표로 미술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마켓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크리에이티브는 절름발이다. 마켓Market에서 회자되고 팔리는 물건과 행위를 통틀어 마케팅Marketing이라고 하는 거다. 그럼으로 크리에이티브로 밥을 먹겠다고 선언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디자이너나 기획자가 아니고 이 ‘마케팅’이라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걸 잘 못하면 밥을 굶어야 하고, 시장에서 인정해 주는 재능이 없다면 골방에 들어가서 자기 예술을 해야 하는 거다. 구스타브 쿠르베와 당신을 비교해 보는 건 어떨까? 당신에게 그와 같은 기초, 그와 같은 전문가로서의 오만, 그와 같은 마케팅을 읽는 능력이 있는가? 아직 능력이 없어도 좋다. 하지만 그것에 집중하고 있는가? 질문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부터가 크리에이터가 되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PS/열아홉 살이 넘은 분들은 검색을 통해 구스타프 쿠르베의 작품을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