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겪어봐야 그 성격을 알 수 있다지만, 주변 지인들의 손글씨를 한 번 떠올려보자. 그 사람의 모습과 닮지 않았는지, 글씨에 성격이 표현되지는 않았는지. 글씨는 무의식이 손가락으로 전달되어 종이 위에 나타나는 일종의 두뇌 표현이라 글씨 모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성격, 잠재적 능력 등이 담겨있다고 한다. 

노숙자의 자취에서 찾은 ‘디자인’

이렇게 사람의 개성을 반영하는 손글씨를 조금 특별한 관점으로 바라본 사례가 있다. 바르셀로나의 노숙인들을 위해 활동하는 에럴스(Arrels) 재단이 사회 소외계층인 ‘노숙자’들의 특별한 손글씨를 본떠 폰트로 제작한 것. 노숙자의 손글씨는 대게 그들이 하루하루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박스에 간결하게 또는 구구절절 슬프게 적혀지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그저 보고 싶지 않은, 알고 싶지 않은 외침으로 존재하기 쉽다. 

에럴스 재단은 모두가 외면해온 그들의 자취인 손글씨에서 ‘디자인’을 발견했고, 그들의 삶을 다시 조명했다. 에럴스 재단은 스튜디오로 그들을 초대하고 종이에 글씨를 자유롭게, 최대한 그들의 개성을 담은 글씨를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손글씨는 디자이너를 통해 폰트로 완성되었고, 폰트제작에 참여한 노숙인의 이름으로 HOMELESSFONTS.ORG 웹사이트에서 판매되고 있다. 필자가 HOMELESS.ORG에서 만난 폰트들은 각각 개성이 있고, 아름다움을 지녔다. 포스터와 패키지에 적용된 그들의 폰트를 보면, 그 활용에 있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본문 서체로의 가독성 논의는 굳이 하지 말자.) 그들의 폰트는 퍼스널 버전 19유로 / 프로페셔널 버전 290유로에 구입할 수 있다. 글꼴 판매 수익금은 에럴스 재단이 지원하는 1,400명의 바로셀로나 노숙자들을 돕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

HOMELESSFONTS.ORG에 방문해보자. 웹사이트에서 노숙자 후원을 강요하는 어떠한 문구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완성된 폰트와 손글씨를 제공한 노숙자의 사진, 영상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간결하고 임팩트있는 디자인이 돋보인다. 그렇다고 단순히 폰트만 판매하는 것은 아니다. 폰트에 대한 INFO를 선택하면 손글씨를 제공한 노숙자의 스토리를 담은 영상이 공개되며, 이를 통해 폰트의 주인공은 ‘길거리 노숙인’이 아닌, 나와 다름없이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다가온다.

그들이 길거리 생활을 하게 된 이유, 길거리 생활을 통해 느끼는 감정, 그럼에도 잃어버리지 않은 그들의 가치관이 영상에 담겨 있다.길거리 생활을 통해 얻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의 소중함, 늘어나는 노숙자들에 대해 걱정하는 이야기는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께 24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에게 공개된 노숙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글꼴 속에 담겨있는 그들의 삶의 무게를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들과 우리가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공존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 

현재 에럴스 재단은 5명의 노숙자를 대상으로 폰트를 제작했지만, 작업을 계속해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그들은 자신이 쓴 글씨가 어떤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한순간의 실수 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떠한 이유로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자신의 글씨가 가치 있게 판매되고 사용되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은 그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될 것이다.

 
 

인간 본연의 표현 ‘손글씨’에서 찾은 가능성

손글씨가 폰트가 되기 위해서는 디지털의 힘과 디자인 툴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폰트의 근원적 힘과 가능성은 자기 생각을 글로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인간 본연의 능력’에서 나온다. 에럴스 재단이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인간 본연의 능력’이 가지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인사이트를 준다.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 즉 교육이나 경제적인 어떠한 영향 없이도 기본적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물론 사례에서처럼 손글씨가 에럴스 재단에 의해 디자인되어 폰트로 가치를 가지게 된 것처럼 그것이 눈에 보이는 가치(환산된 가치)로 다듬어 선보이는 것이 기획자,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새로운 후원 방식

본 칼럼의 6월호(shout 290호)에서도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이용한 특별한 후원 방식을 소개했다. 감정에 호소했던 후원의 방식은 새롭게 진화 중이다. 이번에는 폰트라는 가치를 후원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정당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후원의 방식이 어떻게 진화하든 인간을 향한 본질적인 이해와 배려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